윤종신 나이 프로필 음악 라디오스타
1969년 10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 잠깐 살다가 5살 무렵 서울 광진구로 상경, 그 뒤 대원 외국어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터보라는 이름의 스쿨밴드를 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국어국문학과 88학번으로 입학 후 '소리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라는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다.
본래 음악을 좋아하여 노래나 작곡을 취미로 하긴 했지만 사실 진짜 꿈이 가수, 작곡가는 아니어서 진지하게 노력했던 건 아닌데 우연히 교내 가요제에 참가했다가 수상 후 운이 좋아서 데뷔한 케이스라고 한다.
만약 자신이 신학과에 합격했다면 목사가 되고, 가수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 스타일에도 찬송가의 영향이 크다고도 하는데, 어릴 적부터 기독교 음악을 많이 접한 탓이라고 한다.
미래캠퍼스 홍보비디오에도 나왔고, 과거 라디오에서도 '미래캠퍼스에 다닐 때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다'는 등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이따금씩 했다.
연세대 미래캠퍼스 가요제에서 금상으로 입상한 이후, 과 동기로부터 정석원을 소개받았다. 정석원은 친구의 아파트에서 윤종신의 노래를 듣고 015B의 객원보컬로 픽업했다. 이 때 장호일이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비주얼. 그래도 보컬이 밴드의 얼굴인데.
가창력만으로 승부한 데뷔였던 셈이다.
그런데 윤종신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정석원의 마음을 얻었고, 둘이 급격히 친해지면서 장호일로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90년 7월 15일, 015B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면서 윤종신도 가수로서 데뷔하였다. 같은 해에 데뷔한 신승훈(11월 1일), 윤상(11월 30일)보다도 날짜가 빨랐다. 종종 "나 노태우 대통령 때 데뷔했어!
심지어 걸프전보다도 전이야!"라는 드립을 친다.
이후 5집을 제외하고 015B 6집까지 계속 객원보컬로 참여하였다.
이듬해 1991년 솔로 1집을 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너의 결혼식, 오래전 그날, 환생 등 독자적으로 적잖은 히트를 기록했다. 정규 4집부터는 작사, 작곡뿐만 아니라 프로듀싱도 겸하였고, 5집부터는 작품주의 싱어송라이터로 완연히 거듭났다.
객원보컬로 시작하여 프로 작곡가, 작사가로 인정받은 것은 대한민국 음악 역사상 윤종신이 유일하다. 커리어적으로 발라드계에서 입지전적인 케이스다.
1998년 제대 이후 IMF와 음반시장의 침체로 7, 8집이 망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부터 영화와 예능에 손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초, 여러 편의 영화 OST를 프로듀싱하며 카메오로 출연, 이후 2004년 논스톱 등에 출연하며 연기자로서도 활동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 시기에도 (2001년) 9집 타이틀 팥빙수라는 불멸의 여름 시즌송이 히트하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라디오 스타, 패밀리가 떴다, 나는 가수다 등 굴지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예능 늦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실 윤종신은 90년대부터 라디오 DJ로 활약하며 입담과 예능감을 뽐내 왔기에 예능인으로서의 활약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2008년, 정규 11집 <동네 한 바퀴>를 발매하였지만 철저히 외면당했다.
2006년, 9세 연하의 前 테니스 선수인 전미라와 결혼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이름은 윤라익(아들), 윤라임(딸), 윤라오(딸). 전미라의 이름 끝 글자를 돌림자로 썼다고 한다.
막내딸은 전미라를 거의 빼다 박은 수준으로 닮았다.
2010년대, 윤종신은 발군의 시간관리능력을 보여주며 음악가, 예능인, 연예기획자의 세 직업 분야에서 두루 성과를 냈다.
첫째, 윤종신의 음악 커리어는 2010년대에 이르러 그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 5월, 매달 1곡 이상을 발매하는 음악적 실험인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월간 윤종신은 본능적으로, 막걸리나, 오르막길, 탈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음악가로서 윤종신을 널리 알렸다. 특히, 2017년 6월 발매한 싱글곡 좋니가 대히트하며 데뷔 27년만에 지상파 1위를 하는 쾌거도 이루었다. 2000년대에 비해 창법도 훨씬 안정적으로 변했다. 2020년 현재 무려 20집 가수이다.
둘째, 예능인으로서 윤종신은 라디오 스타의 장수에 힘입어 지상파뿐만 아니라 케이블 및 종편에서도 메인MC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2000년대 중반의 깐족 이미지를 탈피하고 진중하고 매끄러운 진행 능력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윤종신은 2010년 자신이 속했던 1인기획사 신스타운을 확장하여 미스틱89라는 기획사를 세워 자신의 옛 동료인 조정치, 김연우, 하림 등은 물론 투개월, 박재정, 박지윤, 퓨어킴 등 특색 있는 뮤지션들을 모아 앨범을 프로듀싱했다.
이후 미스틱89는 김영철, 아나운서 박지윤 등의 방송인도 매니징함은 물론 가족액터스와 인수합병하며 명실상부한 종합 연예기획사로 거듭났고, 회사명도 미스틱엔터테인먼트로 바뀌었다. 결국 무려 SM의 자회사로 인수되었고, 사명도 미스틱스토리로 바뀌었다.
2019년 6월 4일 방송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차츰 여러 방송에서 하차했다. 2019년 10월 해외로 출국하였으며, 11월부터 '이방인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2021년 3월까지 해외에서 휴식하면서 월간 윤종신 등 다양한 콘텐츠 제작에만 매진할 예정이다.
2020년부로 데뷔 만 30년을 맞았다. 그러나 코로나 여파와 '이방인 프로젝트'로 인해 기념활동 가능성은 미지수.
놀면 뭐하니?를 통해 결국 귀국했음이 확인되었다. 본래는 정말로 이방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해외에서 지내려고 했지만, 코로나 사태와 모친의 위독으로 인해 그 프로젝트를 연기하고서 귀국했다고.
윤종신은 깐족 컨셉으로 장수하는 예능인으로, 오히려 2010년대 이후에는 예능인으로 더 친숙한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이전에도 예능에 가끔 나왔지만 2007년부터 라디오스타, 패밀리가 떴다등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예능인의 입지를 다졌다.
90년대에 가수로 활발히 활동할 때도 윤종신은 이미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깐족의 대명사로 불렸다.
당시 윤종신의 그 간드러지는 평소 목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이 놀랐다고 할 정도. 본인도 "라디오 들어본 사람들은 자기가 원래 이런 이미지라는 것을 알 것."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래서 자구책 느낌으로 예능, 드라마에 나오기 시작하게 된다.
애초에 윤종신의 캐릭터는 촐싹맞고 얄밉게 깐족대기. 아무래도 나이도 나이고 몸도 몸이니만큼, 몸을 쓰는 일(몸개그를 포함하여)은 어려웠던 듯하다.
대신 쉴 새 없이 말로 태클을 걸거나, 특히 다른 사람이 던진 말장난을 한번 더 받아치는 '주워먹기' 개그에 뛰어나다.
그래서 기프갤에서 얻은 별명이 윤자기. 본인도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2010년 공감토크쇼 놀러와 283회에서 갑자기 윤자기 드립을 쳤다. 그 날 윤종신의 활약으로 놀러와는 음악성과 웃음을 함께 거머쥐며 흥했다.
윤종신은 자기가 나오는 프로그램에서는 거의 모든 드립을 주워먹는다. 특히 독한 것은 그 깐족대는 캐릭터와 겹쳐서 독한 드립은 더 독하게 치는 바람에 말리는 시누이 포지션으로 정착한 것. 김구라조차도 명랑 히어로에서 난 최소한 앞에서 때리지 저 형은 뒤에서 친다고라면서 질색했다.
그래서 방통위에서도 대상으로 찍힌 적 있다고 라디오스타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은 예능인 윤종신과 음악인 윤종신의 괴리감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스스로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와 개그맨 비트 다케시와 같이 생각하면서 예능인과 음악인으로서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다고 얘기하고 다닌다고 한다.
2019년 6월 4일 방송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10월 해외로 출국해 2020년을 해외에서 음악 등 다양한 콘텐츠 제작에만 매진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라디오스타, 방구석1열 등 출연 방송에서 모두 하차한다.
이미 모든 프로그램은 녹화를 마쳤고 12년 동안 MC를 했던 라디오 스타에서는 2019년 9월 4일 마지막 녹화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녹화후에 "12년간 나의 수요일 일터 그리고 함께 한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라고 감회를 남겼다. 이로써 이제 대단원의 방송을 마무리 짓는다. 인스타그램 녹화후 소감 방송은 2019년 9월 11일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