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 나이 프로필
심수봉 프로필
본명
심민경 (沈玟卿)
출생
1955년 7월 11일 (67세)
혈액형
O형
가족
아버지 심재덕, 어머니 장형복의 무남독녀
직업
가수, 아티스트
배우자
김호경
자녀
슬하 2남 1녀
소속사
라이트웨이브 엔터테인먼트
데뷔
1978년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
종교
불교 → 개신교
심수봉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했던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등도 모두 음악을 했을 정도로 음악가 집안이었는데요.이런 집안의 환경 속에서 심수봉도 음악인의 삶을 걷게 됩니다.
1975년에 박정희가 청와대 연회에 심수봉을 불러서 노래를 시킨 일이 계기가 되어 음반을 내게 되는데요.
심수봉은 음악적인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여러 악기에 능통했으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일을 했는데, 청와대 연회는 이러한 일의 일환이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심수봉은 그 연회에서 나훈아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가수 나훈아 본인이 듣고 감탄하여 음반작업을 주선해주었다고도 하는 군요. 1978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 MBC 대학가요제에 참여했는데요. 아래 영상 확인해주세요.
심수봉은 자신의 주 전공인 재즈가 아닌 트로트로 도전장을 던졌으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심사위원이 좋은 점수를 안 준 이유는 '너무 프로스러워서'였다고 하는데요. 들어보니 정말 대학생의 실력이 아니고 세련된 목소리입니다.
대학 가요제가 심수봉의 세련된 음악과는 상당히 간극이 컸던것 같습니다.
심수봉 박정희
1979년 궁정동 연회장에 초청되어 노래를 부르던 심수봉은 10.26 궁정동 사태에 휘말려 1981년까지 방송 출연 금지조치를 당했다고 합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합동수사본부가 강도 높게 조사하면서 현장에 있던 것뿐이었지만 조사를 받았고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여러가지 수모를 겪었다고 합니다.
1984년 방송에 복귀를 하고 가정문제로 침체기에 빠졌던 상황에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수록된 앨범이 외설시비에도 불구하고 2만 여장이나 팔리는 판매량을 기록하였습니다.
이후 여러가지 일들이 있고 1995년에 지금의 남편 김호경과 재혼을 했는데요.
결혼 이혼 재혼
KBS‘여유만만’에 출연했을때 심수봉은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이혼한 후 현재의 남편과 재혼을 했었다고 해요.
어머니의 재혼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렸던 아들, 딸이 많이 방황을 했었다며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특히 심수봉은 재혼한 후에도 아이들이 적응을 하지 못해 재혼한 남편과 9년 간 떨어져서 생이별을 해야 했던 사연도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심수봉은 끝까지 기다려준 남편 덕분에 현재는 남편과 아이들 모두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여러 아픔이 있었지만 이번 불후의 명곡에 나와 레전드의 곡들을 듣게 되는 데요. 어려운 시기에 많은 분들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본방 사수!
심수봉 앨범
1978년 10월《제 2회 MBC 대학가요제 omnibus - 그때 그사람》
1979년 5월 《심수봉/최현군 스필릿 음반 - 그 때 그 사람/ 젊은 太陽》
1980년 1월 《심수봉 골든디럭스20곡 - 당신은 누구시길래/여자이니까》
1980년 7월 《심수봉의 제3탄 - 아낌없이 바쳤는데》
1982년 7월 《심수봉의 노래천국 메들리》
1984년 4월 《심수봉 신곡 1집: 그대와 탱고를/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1985년 5월 《심수봉 신곡 2집: 무궁화/나의 사계절》
1987년 2월 《沈守峰 - 사랑밖엔 난 몰라》
1987년 8월 《沈守峰 - 님이여. 나는 야구광》
1988년 9월 《심수봉 - 미워요/이슬비 내리는 오후》
1991년 3월 《沈守峰 - 자기. 우리는 타인》
1994년 11월《7th 沈守峰 단가집 - 비나리/눈물의 술》
1996년 1월 《심수봉 `96 Music Drama - 비나리/눈물의 술》
1999년 2월 《심수봉 - 아! 나그네/잃어버린 사랑》
2001년 11월《沈守峰 - 사랑했던 사람아》
2003년 10월《심수봉 - 비나리》
2005년 1월 《10집 - 꽃》
2007년 10월《11집 - 오늘, 문득》
그외 심수봉 가수까지 데뷔
1955년 7월 11일에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했던 집안이었고,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등도 모두 음악을 했을 정도로 후덜덜한 음악가 집안이었다.
이런 집안의 환경 속에서 그녀도 음악인의 삶을 걷게 된다. 주 전공은 재즈였는데, 최고의 음악가들만 설수있다는 미8군 무대에 로큰롤 밴드 "논스톱"의 드러머로 서기도 했었다.
그녀를 트로트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드럼을 치는 모습에 깜놀하기도 했는데 이런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 '드럼을 치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카펜터즈의 캐런 카펜터와 함께 이야기되기도 한다.
한편, 심수봉은 당초 서산초등학교를 다녔으나, 그녀의 어머니가 이혼후 이사하게 되자, 어머니를 따라 2학년 때 서울 은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후, 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했으나 입원 치료를 위해 또다시 2년 휴학을 했다. 뒷날 인천 인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만 19세인 1974년에 고교 졸업을 했다.
1975년에 박정희가 청와대 연회에 심수봉을 불러서 노래를 시킨 일이 계기가 되어 음반을 내게 된다.
심수봉은 음악적인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여러 악기에 능통했으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일을 했는데, 청와대 연회는 이러한 일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심수봉은 그 연회에서 나훈아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가수 나훈아 본인이 듣고 감탄하여 음반작업을 주선해준다. 이듬해인 1975년에 신세계 레코드를 통한 음반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결국 음반 작업은 취소되었다.
심수봉은 같은 해 만 20세의 나이로 대입준비를 하여 숙명여자대학교 작곡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재수 끝에 명지대학교에 경영학과에 입학한다.
1978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 MBC 대학가요제에 참여했다.당시 영상 보기 당시 대부분의 대학가요제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음악적 성향이 포크나 록이었던 시절에 심수봉은 자신의 주 전공인 재즈가 아닌 트로트로 도전장을 던졌으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
심사위원이 좋은 점수를 안 준 이유는 '너무 프로스러워서'였다. 지금이야 이해하기 힘든 평이지만 당시 대학가요제의 심사기준은 대학생의 풋풋함이었기 때문에 심수봉의 세련된 음악과는 상당히 간극이 컸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1회 대상 수상자 자격으로 게스트 출연을 했던 여병섭(샌드페블즈의 보컬리스트)이 수상 발표 때에 대기실에서 심수봉 옆에 있었기에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금상까지 자신의 이름이 발표되지 않자 대상이라고 확신해서 오히려 더 기뻐했다고 한다.
음악을 들어보면 피아노와 보컬만으로 빅밴드를 압도할 뿐 아니라 악단은 화성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굴욕을 보인다.
여병섭에 따르면, 악단의 연주 실력 때문에 생긴 사고가 아니라 편곡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였다. 악단이 준비한 편곡이 불만이었던 심수봉이 공연 시작 전까지 악단장과 말싸움을 했다고 한다. 결국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각자 알아서 공연에 임하다 보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대학가요제에서 부른 《그때 그 사람》이 히트하면서 가수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그녀와 겨뤘던 출연자들이 후덜덜한데 임백천, 노사연, 배철수 등이다. 이들은 대상은 못 탔으나 다들 이후에 가수로 데뷔했다. 대상은 부산대학교 중창단 썰물이 수상했고, 노사연이 금상, 배철수가 소속된 그룹 활주로가 은상을 받았다.